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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물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하나이면서 천만가지로 작용하는 우리의 마음을 깨닫고 그것을 잘 사용하는 공부를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실패하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 『수심결』은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을 불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편집되어 있다.
* 책 소개 – [바로가기] (마음 다스리는 책, <수심결> 장응철 교무 주해, 3/12/2004, 원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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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저(原著)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불일 보조국사 지눌(佛日普照國師知訥).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子).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황해도 서흥(瑞興) 출생. 지눌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아 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는데, 부모(父母)가 ‘병(病)이 나으면 출가(出家)시키겠다’고 석가모니불에 기원(祈願)을 했더니 병이 이내 나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8세 때 선종(禪宗)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종휘(宗暉)선사에게 출가했으며, 스스로 호를 ‘목우자(소치는 사람)’라 했다.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하다가, 1182년(명종12)에 승과(僧科)에 합격했다.
이 무렵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했다가, 동료들과 함께 후일 결사(結社)를 하기로 약속했다. 25세에 당시 출세(出世)의 관문(關門)이었던 승과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눌은 출세의 길과는 달리 개경(開京)을 등지고 내려와 전남 창평(昌平)의 청원사(淸源寺)에서 정진을 계속하던 중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 처음 깨달음을 얻었다. 1185년에는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로 가서 3년간 《대장경》을 열람했는데, 이때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과 이통현(李通玄)의 《화엄신론(華嚴新論)》을 읽고 선(禪)과 교(敎)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것이 두번째 깨달음이었다.
1190년 몽선화상(夢船和尙)과 함께 팔공산(八公山) 거조사(居祖寺)로 옮겨가 동지들을 불러 모은 다음 예전에 약속했던 결사를 실행했다. 결사의 이름을 ‘정혜(定慧)’라 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했다. 정혜결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왕족과 관료를 비롯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그러나 결사원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결사정신이 지켜지지 않자, 1197년에 거조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은둔했다. 여기서 오로지 수행에 정진했는데, 하루는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가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는 대목에서 세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수행인이 차츰 모여 들자 결사를 새로 시작하고자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3)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왕은 이름을 ‘조계산수선사(曹溪山修禪社)’로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으며, 120일 동안 낙성법회를 열게 했다. 지눌이 이곳에서 교화를 시작하자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왕공(王公)과 사서(士庶)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에 동참했다. 지눌은 이들에게 《금강경(金剛經)》을 읽도록 권하고 《육조단경》의 이치를 가르쳤으며, 《화엄신론》과 《대혜어록》으로 보조교재를 삼았다.
억보산 백운정사(億寶山白雲精舍)ㆍ적취암(積翠庵)ㆍ서석산 규봉난야(瑞石山圭峰蘭若)ㆍ조월암(祖月庵)도 모두 지눌이 개창하여 선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삼은 곳이다. 1210년 3월 법당에서 문도들과 대화를 나눈 직후 입적했다. 《정혜결사문》ㆍ《진심직설》ㆍ《수심결》ㆍ《계초심학인문》ㆍ《원돈성불론》ㆍ《간화결의론》ㆍ《염불요문》ㆍ《상당록》ㆍ《법어》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 중에서 지눌의 저서 《수심결》이 원불교의 《불조요경》에 수록되어 있고, 교단 초창기 선진들이 많이 읽었으며, 현재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지눌이 활동하던 시기인 무신정권기(武臣政權期)에 선종이 융성하게 된 데에는 고려 전기 때부터 왕실과 문벌귀족(門閥貴族)의 비호를 받아온 교종(敎宗) 계통의 사원들이 무신정권기에 들어와 기득권을 박탈당하자 서로 연합하여 난(亂)을 일으키는 등 교종의 반정권적 성격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교리상의 이유도 있었는데, 교종은 학문에 어두운 무신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접근하기 난해한 경전을 통해 교리를 익히는 교리 중심의 종파인 반면, 선종은 복잡한 이론적 접근보다는 참선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던 무인들에게 보다 적절했으며, 또한 교종에 비해 선종이 지닌 상대적인 혁신성은 문신귀족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무신정권의 성향에도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눌의 핵심사상은 《수심결》에 등장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 및 ‘이타적 보살행(利他的菩薩行)의 실천(實踐)’이라고 할 수 있다.
① 돈오점수: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단박에 깨달은(頓悟) 후에도 깨닫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몸에 배어 온 습관의 기운이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로 점차 지속적으로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漸修)는 것.
② 정혜쌍수:계속 수행하는 점수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는 것으로 수행에 있어 정(定)과 혜(慧)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고요하게 하는 선정, 곧 마음의 본체(根本智)’를 뜻하고, 혜는 ‘사물(事物)을 여실하게 보는 덕목, 다시 말해 마음을 신령스럽게 아는 영지(靈知)의 작용’을 의미함.
③ 이타적 보살행:깨달음을 얻은 후에 ‘이타적 보살행’이 없다면 고요한 곳에 빠져버려 깨달음에 생명력이 없게 된다면서, 중생(衆生)의 능력과 형편에 맞추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굳은 원(願)을 내어 실천해야만 그 깨달음은 비로소 원만히 완성된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에 의하여 불교운동에 그치지 않고 역사 정화운동(歷史淨化運動)으로 발전하는 등 사회의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출처: 김도공, 원불교 대사전, [바로가기])
– 주해(註解): 경산 장응철 상사
경산 장응철 상사는 원불교 성직자로 1940년 전남 신안군 장산면 다수리에서 출생했다. 1960년에 당시 원불교 종법사인 정산종사를 뵙게 되면서 ‘정치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원불교에 입문과 동시에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4년 동안 교정원 총무부 서기를 마치고 1961년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 1968년 졸업했다. 첫 발령지로 원불교의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영산선원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원불교 교정원 총무부 과장, 서울사무소 사무장, 총무부장, 청주교구장, 영산대학학장, 영산사무소장, 서울교구장, 교정원장, 중앙중도훈련원장을 역임했다. 1975년 정남을 서원하였으며, 1988년 정수위단원에 피선되었고, 2000년 종사 서훈을 받았다. 2006년에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에 추대되었다.
종법사 재임시절, 대산종사가 제창한 세계평화를 위한 3대 제언(종교연합운동, 세계공동시장개척, 인류심전계발운동)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등 지난 12년 간 종교연합운동과 종교간 협력을 통한 세계 평화에 노력해 온 경산 상사는 2018년 은퇴 후 원불교 세 번째 상사로 지내고 있다.
주요 저사로는 일원상서원문 《마음달 허공에 뜨다》, 참회문 《죄업으로부터의 자유》, 《작은 창에 달빛 가득하니》가 있고, 불조요경 중에서 금강경 《생활 속의 금강경》, 반야심경 《자유의 언덕》, 수심결, 목우십도송《마음소 길들이기》, 고경《노자의 세계》《육조단경》등의 해설서가 있다.
* 경산 장응철 상사에 대해 (자세히) – [바로가기]
CONTENTS 
제1편 마음이 바로 부처
제2편 견성과 신통
제3편 돈오와 점수
제4편 선정과 지혜는 한몸
제5편 스승님의 간절한 부탁 말씀